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문단 편집) === [[영국]] === 아이러니하게도, 영국의 목표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양면 전쟁에서 물적, 질적으로 상대를 압도하는 것이었다. 대영제국으로 전세계에 군림하던 영국은 '2위, 3위, 4위 등등의 해군력을 가진 국가들이 동맹을 맺어 영국에게 도전하면 어떻게 하지?' 라는 고민을 가지고 있었고, 그 나름대로 내놓은 해결책은 2위, 3위의 합산보다 더 큰 해군 세력을 유지하는 --무식한-- 것이었다. 이는 1889년 제정된 해군 방위법을 배경으로 한다. 이를 이국 표준 정책이라 부르며, 영어로는 Two-power standard 정책이라 한다. 당시에 영일동맹은 최전성기였으나, 카이저마리네는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스캐퍼플로에서 몰락하였으므로]], 결국 영국의 건함 목표는 미국과 일본의 함대 총합보다 거대한 해군력을 운영하겠다는 것이 되었다. 그 결과 영국에서는 각각 4척의 전함과 순양전함을 건조하는 [[N3급 전함|N3]]/[[G3급 순양전함|G3]] 건함 계획이 진행되게 된다. N3급 전함은 아직 계획조차 없던 [[야마토급 전함]]과 비등했고, G3급 순양 전함은 당대의 거함이었던 [[어드미럴급 순양전함]] 이상이었다. N3급을 위한 18인치 주포는 실제로도 발주되었다. 1920년 12월부터 다음 해 1월까지 정부가 기술을 제공한다는 조건 하에 2개 제작사가 입찰했는데, 조약이 거의 마무리 단계였던 1922년 1월 30일에 발주가 취소된다.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직후 건조된 [[넬슨급 전함]]에는 G3급에 장착하려 했던 16인치 포가 완성되어 탑재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세계최강, [[팍스|팍스 브리타니카]]의 [[대영제국]]이라지만 독일 제국과 미칠 듯한 건함경쟁을 벌이고, 5년 동안 세계 대전을 치르며 막대한 전비를 소모한 전후에는 건함경쟁을 벌일 힘이 없었다. 이미 팍스 브리타니카는 유지하기 버거워지고 있었으며, 막대한 전비지출로 전후 경쟁은커녕, 전함 수병들에게 줄 봉급이 없어서 수병들이 파업을 할 정도였다.([[인버고든 항명]])여기서 유혈 진압이 있었다면 [[러시아 혁명]]에 무너진 로마노프 왕조처럼 윈저 왕조도 그들의 길을 따라갔겠지만, 수병들은 계급의 권위를 존중하면서 파업하려 했고, 이를 받아들인 일선 장교들이 중재하면서 주동자 수병 몇몇이 퇴역하는 선에서 끝나게 되었다. 영국 왕실과 내각 입장에선 천만 다행인 일이었다. 또한, 영국은 1차대전으로 만신창이가 된 국고를 독일에게 [[베르사유 조약]]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아서 채우려고 했지만, 더한 망신창이가 된 독일은 그럴 여력이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돈을 갚을 수 없다며 디폴트를 선언했고, [[루르 점령|프랑스군이 독일 영토를 점령하는 난장판 속에]] 독일이 내기로 한 전쟁배상금은 [[도스 안]]과 [[영 안]]을 통해 감경되었다. 이후 나치 독일이 집권하고 독일이 분단되는 통에 배상금은 받을 수가 없었고, 결국 독일이 배상금을 모두 지불한 해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도 20년이 지난 2009년이다. 결국 영국이 돈을 쥐어짜낼 구석이라고는 공장을 돌려 식민지에 강매하며 더욱 더 수탈하고 저소득계층을 국가 계획에 동원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나 영국이 하원과 인텔리 계층의 반발을 진압하며 의회민주주의를 집어던지고, 독일이나 일본처럼 국가 사회주의+군국주의 테크를 타면서 식민지에 기관총을 긁어대려는 게 아닌 이상은, 이 두 방안을 실행하는 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영국은 세계 모든 해역에서 [[제해권]]을 유지해야하는 판국이었다. 독일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이상 미국은 [[대서양]]을 두고 대립하는 가상적국이었으며, [[프랑스 제3공화국]]은 연합국이라고 하기에는 [[영프관계|영원한 숙적이자 라이벌이고]], [[이탈리아 왕국]]은 [[지중해]]에서 영국의 패권에 도전하는 세력이었으며,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상황에서 [[일본 제국]]과의 [[영일동맹]]도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팍스 브리타니카를 외치며 기존의 1 > 2+3 정책의 유지를 한다는 것은 제국의 해체를 가속화시키든가, 혹은 영국 스스로가 자부심을 가지며 쌓아올린 정치적 유산을 모두 내버리는 어리석은 행동에 불과했다. 따라서 건함 경쟁을 자제하는 것이 영국 내부적으로는 경제적, 정치적으로 많은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미국의 이상주의에 따른 제안에 적극 찬동하게 된다. 그리고 먼 훗날의 이야기지만, 언뜻 보기엔 도가 지나쳐보였던 영국의 악몽은 2차례의 군축 조약을 거친 결과, 독일(33%) + 이탈리아(33%) + 일본 해군(6-70%) 세력이 영국의 해군(100%) 세력보다 상당히 앞서게 되면서 현실이 되버린다. 하지만 2차 대전 직전의 영국이 군축외에 다른 선택을 했을 거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그리고 우려하던 미 해군이 결국 같은 진영으로 참전했으니 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